8월초 어느 날 A씨는 예년에 비해 유난히 더운 여름 날씨를 견딜 수 없어 에어컨을 사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한 전자제품 매장엘 가보니 폭염 때문에 에어컨이 다 팔려서 3주 정도 걸려야 에어컨을 살 수 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A씨는 에어컨을 선주문하고 가격도 지불해놓고 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일주일을 지내보니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전자제품 매장에 가 보니 역시 재고가 없는데, 점원은 10여일만 있으면 신규 물량이 나온다고 했다. A씨는 하루라도 더 일찍 무더위를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한 대 더 주문했다. 하루라도 먼저 도착하는 에어컨을 쓰고 나머지 한 대는 부모님댁에 보내드리거나 아이들 방에 따로 놓아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도 채 안 돼 더위는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10여일 후 에어컨 두 대가 하루 간격으로 A씨 집에 나란히 도착했다. 때는 8월말이었고, 날씨는 아침 저녁으로 선선해지기 시작했다. 한낮이라도 선풍기 바람으로도 충분히 더위를 식힐 수 있을 정도였다. A씨는 다음 해 여름까지 에어컨을 틀어보지도 못하고 묵혀야 했다.


        위의 예는 물론 가상의 사례다. 우스꽝스러운가? 그럴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다. 독자들은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현실에서는 이런 멍청한 짓 투성이다. 그런데 이런 멍청한 짓들이 우둔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다. 대부분 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심지어는 매우 똑똑한 사람들이 일정한 시점에 내리는 ‘합리적’ 판단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결과들을 빚어내는 경우가 많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품 공급과정에서 일어나는 시간 지연(time delay)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없을 때도 이런 결과들이 빚어진다.


        이 같은 메카니즘을 생생히 보여주는 시뮬레이션 게임이 있다. MIT 슬로안 경영대학원에서 개설되는 ‘시스템 다이내믹스(system dynamics)' 수업은 초기에 학생들이 조를 짜서 ‘맥주 유통 게임(Beer Distribution Game)’을 해보게 한다. 공급 과정에서 일어나는 시간 지연이 생산공장과 유통업자, 도매상, 소매상, 소비자를 거치면서 연쇄적으로 어떤 파급효과를 일으키는 지를 간접 체험해보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은 이런 식이다. 학생들이 각각 소비자와 소매상 등 한 가지 역할을 맡는다. 소비자가 주문을 내면 이에 반응해 소매상--->도매상--->유통업자--->공장으로 이어지며 주문을 내게 된다. 각 단계에서 학생들은 재고를 갖게 되면 한 상자당 0.5달러, 주문 적체(마이너스 재고)가 생기면 한 상자당 1달러의 손실을 보게 된다고 가정한다. 즉, 재고를 최대한 0에 가깝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게임이 시작되면 소비자는 처음 몇 주 동안 4 상자를 주문하다가 이후 8상자로 올려 주문한 다음에는 게임이 끝날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소매상, 도매상, 유통업자, 공장 등에서는 소비자 주문이 8상자로 오른 다음에는 주문이 들쭉날쭉 해진다. 소비자 주문은 8상자로 올라선 뒤 일관됐는데도 각 공급 단계의 반응은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또 각 단계별 재고는 +에서 -로 진폭이 생겨나고, 약 20~25주에 걸친 사이클도 생겨난다. 특히 소비자 주문 증가에 대응한 공장의 생산량 증가는 약 15주 후에 절정에 이르렀고, 생산증가량은 주문 증가량의 약 4배였다. 각 단계의 행위자들은 재고량을 최대한 0에 가깝게 만들려 하지만 실제 재고는 크게 넘치거나 모자라는 주기를 되풀이했다. (Business Dynamics, P689) 이 같은 반응은 이 게임이 수십 년 동안 전통처럼 되풀이되는 동안 한결같았다. 이 게임은 현실의 복잡한 공급 과정에 비해서는 훨씬 단순화된 시뮬레이션인데도 이 같은 진폭과 불안정성이 나타났다. 공장의 기계 고장부터 시작해서 수송 사고, 노조 파업, 양산능력의 한계나 예산 제약 같은 것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에서는 불안정성이 훨씬 증폭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이 맥주 유통 과정에서만 발생할까? 아니다. 오히려 시장 수요의 시그널에 반응해 시장에 제품이 재빨리 공급되는(즉, 시간 지연이 적은) 공산품은 덜한 편이다. 공급 과정에서 시간 지연이 많이 생기는 주택시장은 이런 진폭 현상이 훨씬 심하고 진폭의 주기도 길다. 주택 시장의 시간 지연으로 인한 집값의 등락 사이클은 세계 각국에서 오랫동안 관찰돼온 일반화된 현상이다. ‘시스템 다이내믹스’ 수업의 기본 교재로 사용되는 존 D 스털먼 교수의 명저 ‘비즈니스 다이내믹스’에도 부동산 시장의 버블과 거품 붕괴 현상을 아예 케이스 스터디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스털먼 교수는 “부동산 시장은 가장 불안정한 주기성을 띤 자산 시장 가운데 하나로 약 10~20년에 걸친 증폭 주기를 가진다”고 적어 놓고 있다. 부동산 시장에서 그 같은 주기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의 설명을 인용해보자. (시스템 다이내믹스에 나오는 용어는 충분한 설명 없이는 오해를 부를 수 있으므로 일부 표현은 필자가 일반적 용어로 대체하거나 생략했다)


        “상업 용지 수요는 경제 활동에 좌우된다. 해당 지역 고용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공간이 필요하고 공실률은 떨어진다. 공실률이 낮을 때 임대료는 오르기 시작한다. 임대료 상상은 기업들이 직원 일인당 공간을 줄여 적응함으로써 약간의 수요 감소로 이어진다. 하지만 수요 반응의 탄력도는 낮고 반응 시간은 길다. 공급 측면에서는 상승하는 임대료는 기존 자산들의 수익성과 시장 가치를 높인다. 가격이 높고 상승 중일 때 임대료와 운영 수익은 높고 디벨로퍼들도 상당한 자본 이득을 실현할 수 있다. 높은 수익은 새 디벨로퍼들을 끌어들이고, 그 붐에 편승해서 돈을 벌려는 금융적 지원도 부족함이 없다. 많은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들이 시작되고, 이는 개발 중인 건물들의 공급을 부풀린다. 오랜 지연 끝에(2~5년) 임대 공간은 늘어나고 공실률은 떨어지며 임대료도 시장 가치를 끌어내리면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이익이 떨어지면 개발 비율도 떨어진다. 시장은 가격을 통해 수요 공급의 균형을 잡으려는 음의 순환고리를 만든다.

 

        새로운 개발 사업의 수익성을 평가할 때 디벨로퍼들과 투자자들은 수요와 공급의 성장을 전망함으로써 장래 공실률을 예측해야 한다. (중략) 그렇게 했다면 새 개발 프로젝트 착수율은 임대료가 정점에 이르기 훨씬 전에 떨어졌을 것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공실률이 낮고 수익이 높다 해도 수급 균형을 이룰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한다. 하지만 임대료의 정점이나 그 이후에야 건물 공급은 정점에 이른다. 다시 말해 부동산시장에 공급이 과잉되고 공실률이 높아지며 임대료가 떨어진 다음에 말이다. 디벨로퍼들은 지금 당장 수익이 높다고 본다면 새로운 개발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한다. 프로젝트를 끝내는데 2~5년이 걸리는데도 말이다. 이 공급과정을 계산에 넣지 못하기 때문에 붐일 때는 건물 과다 공급으로 이어지고 거품이 꺼진 뒤에는 건설 투자가 재빨리 살아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지난 100년 이상동안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이어 스털먼 교수는 이 같은 상황에 대한 업계의 의사 결정자들에 대한 MIT 학생들의 면담 조사 결과를 소개한다. 그가 요약한 내용 가운데 하나는 이렇다.

        “(업계의 의사 결정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건설 물량에 상관없이 임대료와 주택 가격이 일정한 속도로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들은 공실률과 임대료, 수익률, 건설 물량, 임대 공간 공급 물량들 사이의 반복작용(feedback)을 인식하지 못했다.” “과잉 공급이 부인할 수 없이 명확해졌을 때도 디벨로퍼들은 종종 자신들보다 못한 다른 프로젝트들이 피해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대응을 늦춘다.” 

        지금 한국의 건설업계 종사자들도 거의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또한 건설업계의 요구에 따라 집값이 오르는 지난 몇 년 동안 줄기차게 주택 공급만을 강조해온 정부 당국자들의 인식도 비슷한 수준일 것이다. 스털먼 교수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전체 시장에 공급이 넘쳐날 때, 심지어 가장 좋은 위치의 가장 좋은 개발사업도 피해를 본다.” 왠지 분양 물량 당첨자의 40%가 계약을 포기한 반포 자이의 사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쯤에서 최근 국내 부동산시장의 상황을 위 내용에 대입해보자. 외환위기 이후 몇 년 동안의 집값 상승은 수급 불균형 측면에서도 합리화될 수 있었다. 외환위기 이전부터  건설 경기 침체로 주택 잠재수요량은 지속적으로 늘어난데 반해 실제 공급량은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2001년 부동산 투기 붐이 일면서 아파트 신규 공급이 급증해 공급 부족이 빠르게 해소됐다. 실제로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지난해 연구결과에 따르면 2000년 약 41만호에 이르렀던 수도권의 아파트 잠재적 공급량 부족은 2006년에는 7만3000호까지 빠르게 줄어든 것으로 분석됐다. 이 연구소는 다주택보유 가구 및 수도권 비거주자의 투기적 가수요를 빼면 수도권의 아파트 잠재적 공급 부족은 거의 해소됐다고 주장했다. 전국적으로 보더라도 최근 몇 년동안 매년 50만~60만호로 사상 최고 수준의 공급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주택 시장이 2006년 이후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급 과잉은 미분양 물량 급증과 잇따르는 분양 미달, 입주율 저조 등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 4월 미분양 주택 수는 전국적으로 12만 9859호에 이르렀지만 실제 미분양 물량은 두 배 가량인 25만가구에 이른다는 것은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히 올들어 수도권에서 분양한 5만352가구 중 미분양 물량은 19.5%인 9819가구나 됐다. 최근 서울 마포구 합정 균촉지구의 주상복합으로 시선을 모은 ‘서교자이’가 1순위 분양에서 대규모 미달 사태를 빚은 것이나 은평뉴타운의 입주율이 약 4분의 1에 불과한 것도 같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책 내용을 생각해보면 집값 버블 붕괴가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들이 아닐까? 물론 집값 부양의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이명박 정부가 하기에 따라 거품 붕괴는 지연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 집값 거품 붕괴는 필연에 가깝다. 더구나 집값 거품이 한 번 붕괴하기 시작하면, 그 하락 폭은 상당히 클 가능성이 높다. 맥주 유통 게임의 결과에서 실제 수급의 불균형에 비해 시장 전체의 반응은 매우 크게 증폭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집값도 예외가 아니다. 초기 수급 불균형으로 촉발됐던 집값 상승이 부동산 시장 내의 요인들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 문화적 변수들까지 합쳐져 크게 부풀려진다. 하지만 집값이 내릴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실제 공급이 초과된 정도를 훨씬 넘어서 집값이 격렬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공급과정의 시간 지연으로 인한 수급 불균형만이 집값의 거품 형성과 붕괴 사이클을 만드는 요인은 아니다. 달러 유동성 급증과 저금리 기조에 편승한 은행의 마구잡이 담보대출과 앞뒤 안 가리고 엉터리 부동산 대책을 쏟아낸 정부 정책의 난맥상, 건설업체와 관료들의 유착, 건설업체들의 분양가 담합 및 투기 붐에 편승한 고분양가 조작, 부동산 광고를 매개로 한 언론의 왜곡 보도, 부녀회 등의 집값 담합과 일반 가계 및 기업들의 투기 붐 편승 등이 모두 집값 거품 형성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 같은 거품이 이제 꺼질 수밖에 없는 국내외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집값 대세하락을 전망하는 5가지 이유’라는 제목으로 다음 블로거뉴스에 띄운 글(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1476151)을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가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택 수급이라는 측면에서도 이제 집값이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 같은 메카니즘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 ‘공급 부족론’을 들고 나오며 10개의 2기 신도시 개발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서울시가 이명박 전임시장 시절 지정했던 35개 뉴타운의 주택 공급 물량도 2009년 이후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한다. 지금도 공급 초과 상황에서 집값이 하락할 수밖에 없는데, 정부 계획이 실현되기 시작하는 2010년대 집값은 어떻게 될까? 그때가 되면 정부나 서울시도 부동산 시장 위축 상황을 보며 계획을 수정할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꼭 그러리라고 장담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동안 유사한 방식으로 숱한 엉터리 정책들을 저질러왔기 때문이다. 저출산 고령화 추세로 돌아섰는데도 70년대식 가족계획 정책을 불과 몇 년전까지 지속해왔던 정부가 아닌가? 쌀이 남아도는 게 뻔히 보이는 시점에도 대규모 새만금 간척지를 개발했다가 그 용도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몰라 쩔쩔매는 정부가 아닌가? 더구나 외환위기 충격을 완화한다는 명목으로 분양가 자율화와 전매 제한 해제, 세금 인하 등 각종주택 및 부동산 규제 완화 정책들을 집값 폭등이 계속된 이후까지 지속한 것도 마찬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언제쯤이면 정부는 이런 엉터리 짓을 멈출 수 있을까?  

by 선대인 2008. 9. 3. 01:25
최근 수도권의 전반적인 집값 하락세가 완연해지자 정부와 한나라당은 각종 집값 부양책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이들 정부 수장들과 한나라당의 인식을 보면 현 사태의 문제점을 단단히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노무현 정권 당시 도입한 각종 규제 때문이라는 부동산시장이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때문에 시장에서 정상적인 거래가 일어나지 않고, 조급해진 일부가 급매물을 내놓다 보니 집값 하락 움직임이 나타난다는 식의 인식이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인식이 정말 이렇다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집값 거품 형성과 붕괴 과정의 메카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대출 규제나 건축 규제 등의 영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07년 이후 일어나는 거래 부진 현상은 기본적으로 부동산 버블이 끝물에 이르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당한 기간 동안 집값은 높은 상태로 유지되는 반면, 거래량은 급속히 주는 이른바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현상이다. 집값이 높은 고물가 현상과 거래 부진이라는 경기 침체 현상이 부동산 시장에서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이 현상은 부동산 버블의 고점에서 매수자와 매도자간 집값에 대한 기대 차이 때문에 일어난다. 잠재적 매수자들은 집값이 너무 높아져 더 오를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는 반면 잠재적 매도자들은 아직 집값이 더 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수자와 매도자간 치열한 힘겨루기를 하는 기간이다. 앞에서도 봤지만 이 기간은 투자수익률이 급감하는 단계이므로 잠재적 매도자들은 오래 버티기 힘들다. 특히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수록 버티는 힘은 약할 수밖에 없다. 집값이 정체된 상태에서 거래가 부진한 기간이 길어지면 ‘경제 체력’이 약한 사람들부터 하나 둘씩 집값을 낮춰 내놓기 시작한다. 매월 이자 부담만으로 몇 백 만원이 눈앞에서 깨지는 상황에서 집값을 낮춰서라도 파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의 매물이 늘면 집값은 더 떨어진다. 다른 사람의 매물보다 싸거나 비슷해야 집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수자들은 급할 게 없으므로 거래는 여전히 잘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집값은 계속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되고 거품의 붕괴가 일어난다. 요약하자면 투자수익율 저하--->매수자와 매도자의 힘겨루기--->급매물의 증가--->집값 하락--->추가 집값 하락--->본격적인 거품 붕괴의 단계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지금 국내 부동산시장은 전형적인 버블 붕괴 초기의 증상을 보이고 있는 셈이다.

 

      과거 90년대초의 일본이나 지금의 미국에서도 이런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기간을 거친 뒤 버블이 붕괴했다. 일본의 경우 90년 중반부터 부동산 가격이 거의 정체상태에 있다가 92년초부터 폭락하기 시작했다. 반면 택지 거래량은 90년 221만 건에서 92년 182만 건으로 급감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2005년 말부터 서브프라임론 사태가 본격화된 2007년 중반까지 기존 주택 가격이 정체 상태를 보였다. 같은 기간 거래량은 급감했다. 미국과 일본의 사례를 보면, 대략 1년반~2년 가량의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이 버블 붕괴에 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국내의 경우는 어떨까? 2006년말 거래량과 집값이 동반 상승한 뒤 2007년초부터 집값은 주춤하고 거래는 절반 가량으로 떨어져 위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007년 말부터 2008년 상반기까지 거래량이 소폭 증가하고 있지만, 이는 분양가 상한제 시행을 앞둔 분양 증가 및 뉴타운 파장, 종부세 회피 매물 증가 등의 이유 때문이다. 특히 6, 7월의 거래량이 다시 줄어든 것을 보면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7년초를 기준으로 할 때 국내 부동산시장도 이미 1년반 가량의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기간을 지난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의 패턴을 고려한다면 향후 어느 순간 국내 부동산 시장의 거품 붕괴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정치적, 정책적 변수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실제로 2008년 5월 이후의 집값 하락 현상은 거품 붕괴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현상이다. 다만 현 정부의 집값 부양 의지에 따라 거품 붕괴가 일정 기간 지연될 수도 있을 것이다. 국내의 경우 정치적, 정책적 요소가 부동산 시장에 미치는 파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품 붕괴 압력이 국내외에서 점증하는 상황에서 ‘정권의 힘’으로 얼마나 더 오래 지탱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부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부동산 규제 완화 움직임이 본격화하면 집값이 하락세를 멈추고 한 번 정도 더 뛰지 않겠느냐고 기대하는 눈치다. 하지만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기간은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음을 확인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미국의 집값 그래프를 보면, (그래프를 보면 좋은데, 여기에 옮겨올 수 없어 안타깝다) 부동산 스태그플레이션 현상 기간에도 미미하지만 두 차례의 조정과 반등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반등기에 거래량 증가는 동반되지 않는다. 호가 위주의 집값 반등이었던 셈이다. 집값 거품이 극에 이른 것을 알게 되고 추가 대출조차 어렵게 되자 매수자들이 더 이상 거래에 가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같은 반등 시도가 과거와 같은 대세 상승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집값 거품 붕괴는 시작된다. 국내의 경우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세금 부담을 줄이고 건축규제를 풀어주면 주택 보유자가 좀 더 버틸 여력은 줄 것이다. 미미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소폭의 반등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권의 힘’에 대한 기대심리 때문에 호가 위주로 반짝 상승하는 것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이런 국면에서 매수세가 따라붙지 않는다면 결과는 뻔하다. 매도자까지 포함해 전 시장 참여자가 더 이상 집값 상승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집값은 급락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볼 때 이명박 정부의 집값 부양책이 얼마나 효과를 볼지, 그리고 다급한 주택 보유자들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by 선대인 2008. 9. 3. 01:23

“버블이 붕괴하면 서민이 더 피해를 본다”며 부동산 부양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이 종부세 완화를 주장하면서 ‘강남의 6억원 이상 주택 보유자는 중산층이라고 했다는데, 혹 이들이 일컫는 서민들은 다주택 소유자들을 의미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본래 의미의 서민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 말은 가당치도 않다.

왜 그런가 한 번 따져보자. 집값이 오를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다주택 보유자들이다. 부동산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가격 상승이 큰 부동산을 가지고 있을수록 가장 큰 이득을 보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때 가장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야말로 무주택 서민이다. 그 다음은 집이 있어도 집값이 거의 오르지 않은 사람들이다. 일반 재화와 달리 주택은 사람들이 소유든, 전세든, 월세든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지 않고 생활할 재간이 없다. 노숙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다른 많은 재화들은 가격이 오르면 사지 않거나 다른 물건으로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집은 그럴 수가 없다. 또 같은 자산이라고 하더라도 주식과 같은 경우에는 주식 투자자들만이 이득이나 손해를 본다. 내가 참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주식이 폭등해도 그 혜택을 볼 수 없고, 아무리 폭락해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집은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 오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부동산 투기에 가담하지 않더라도 영향을 안 받을 도리가 없다. 특히 집값이 오르면 무주택자들은 집값이 오른 만큼 실질 소득이 감소하는 효과가 생긴다. ‘내 집 마련’ 집착증이 강한 한국인의 경우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예를 들어, 집값이 두 배로 뛰면 내 집 마련을 목표로 하는 사람의 경우 집을 사기 위한 저축기간이 두 배로 증가한다. 또는 같은 월급으로 두 배를 저축해야 한다. 집값 상승으로 무주택자의 월급이 사실상 감소하거나, 삶의 질이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한국처럼 가계 자산에서 부동산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고, 전체 생활비용 가운데 주거비 비중이 큰 나라에서는 이런 효과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집값이 오르면 무주택 서민들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그러면 집값이 빠질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당연히 집값이 오를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다. 땅이나 집을 여러 채 가진 부동산 부자들이다. 그런데 정부와 정치권, 엉터리 언론과 전문가들이 이런 상식을 부정하고 서민이 가장 피해를 본다고 떠들어대니 기가 막힌다. 집값이 오를 때 가장 피해보는 사람들이 왜 떨어질 때도 가장 피해를 보게 된다는 말인가? 서민들은 어떤 경우든 피해보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것인가? 중학교 수준의 경제학 상식을 이렇게 되풀이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플 뿐이다. 자기 집이 없는 42%의 무주택 서민이 집값이 떨어진다고 왜 피해를 본다는 말인가? 그리고 집값이 거의 오르지 않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 30%도 집값 하락으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다. 그리고 집값이 많이 올랐던 지역의 주택 소유자라도 원래 자기 집에 살던 사람들 20% 정도는 실질적으로는 피해가 없다. 오를 때 기분이 좋았다가 내릴 때 제 때 못 팔았던 것을 후회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정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투기를 일삼거나 거기에 편승했던 사람들 약 10% 정도, 그 가운데 특히 무리하게 빚을 얻어 다주택을 소유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보면 집값이 오르고 내림에 따라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런데도 ‘버블 붕괴 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게 서민’이라고 떠드는 세력들은 왜 그렇게 말할까? 선의로 해석하자면 버블 붕괴 시 경제적 충격이 동반되니 이때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번 부풀어 오른 버블이 꺼지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버블이 커질 때부터 이미 서민들은 집값 상승으로 인한 상대적 소득 하락뿐만 아니라 이로 인한 내수 위축, 임대료 상승, 양극화 심화 등으로 고통받아왔다. 그렇게 버블을 키워 서민들의 삶을 잔뜩 힘겹게 해놓고도 여전히 버블은 꺼지면 안 된다고 한다면 계속 버블을 키우자는 말밖에 안 된다. 현재의 버블이 유지되거나 더욱 부풀어 오르는 상황에서는 결코 서민들의 삶이 개선될 수 없다. 당초부터 버블을 키우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미 버블이 커졌다면 지금이라도 서서히 버블을 꺼트리는 것이 옳다. 물론 상당 기간 버블 붕괴의 충격으로 고통스럽겠지만, 결국 그것은 버블이 형성될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버블이 꺼져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민을 비롯한 가계 전체가, 그리고 한국 경제 전체가 정상적인 경제 활동으로 돌아갈 수 있다. 따라서 정부와 정치권이 정말 선의로 그런 주장을 했다고 한다면, 실제로는 서민에게 전혀 도움 되는 길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이 이런 선의로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버블 붕괴 시 가장 큰 경제적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역시 부동산 부자들이다. 서민들의 삶도 어려워지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부동산 부자들을 위해 대놓고 부동산 부양책을 쓰려는 자신들의 진짜 의도를 감추기 위해 동원된 궤변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핑계를 대며 부동산 부양책을 쓰는 것은 매우 사악하다. 정부와 정치권이 서민을 보호하기는커녕 투기자나 부동산 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집값을 떠받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식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투자도 자기 책임 하에 하는 것이다. 집값 상승으로 이익을 볼 때는 부동산 투기자들이 몽땅 차지하게 하더니, 왜 집값이 떨어질 때는 정부 재정과 행정력을 동원해 그들의 손실을 막아야 한단 말인가? 집값 폭등으로 겪는 서민들의 고통을 이렇게 생각하는 정부와 정치권이었다면 지금처럼 거품이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동산 부자들을 위한 부양책을 쓰면서 서민을 위하는 척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기만적인 행태는 비열하기 짝이 없다.

by 선대인 2008. 9. 3. 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