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20대 청년세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이 때문에 나는 이들 세대를 6무세대라고 부른다. 왜 6무세대인가? 원래 나는 이들 세대를 5무세대라고 불렀다. 2000년대 내내 부동산 거품이 부풀어오르다 보니 생산경제에 돈이 돌지 않고, 그러다 보니 일자리가 생겨나지 않고 내수는 계속 위축됐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20대 청년세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가질 수 없고, 변변한 소득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 자기의 집은커녕 좋은 방 한 칸 가지는 것이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일자리와 소득, 집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연애도, 결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 젊은 세대들이 연애도, 결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다 보니 아기를 가지는 것이 너무나도 버거운 세대가 돼버렸다. 부동산 거품 때문에 우리 젊은이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랑 욕구, 번식 욕구조차 제대로 충족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 188개국 가운데 출산율이 186위일 정도로 기괴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일자리, 소득, 집, 사랑과 결혼, 아기 등 다섯 가지를 가질 수 없는 세대라는 뜻으로 처음에는 5무세대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내용을 트위터에 올렸더니 한 젊은 트친이 답글을 보내주었다. “우리는 6무세대입니다.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세대이니까요.” 그 댓글을 보는 순간 수천 개의 표창이 한꺼번에 날아와 내 가슴에 박힌 듯 마음이 아파왔다.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니. 하지만 정말 그랬다. 우리의 부모세대나 외환위기 이전 사회에 진출한 90년대 학번 이전 세대가 자라온 물질적 환경이 평균적으로 지금의 20대나 그 이후 세대보다 더 나빴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우리의 부모세대는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고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던 세대이고, 386세대는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에서도 민주화의 기틀을 닦았던 세대이다. 그들은 오늘은 힘들어도 더 밝은 내일을 꿈꿀 수 있었고, 당장 자신은 힘들어도 자신들의 자식들은 더 좋은 나라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꿈꿀 수 있었던 세대이다.

 

그런데 지금의 20대 이하 세대는 그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양극화의 편차가 매우 극심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평균적으로는 물질적 풍요함이 극에 이른 시대에 이들 세대가 집단적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일부에서는 이들 세대들에 대해 “왜 너희들은 짱돌을 들지 못하느냐” 또는 “왜 486세대처럼 정치적 행동에 나서지 못하느냐”라고 질타하거나, 심지어 “너희들이 투표 안 한 탓이다”는 식의 힐난을 퍼붓기도 한다.

 

나는 이들 세대에게 그런 식으로 윽박지르거나 비난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가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생각한다면 이들에게 과거와 같은 전투적 정치행동을 손쉽게 요구하는 것은 ‘꼰대스러운’ 기성세대의 표현일 뿐이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힘차게 약진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만들어주지 못한 데 대한 일말의 반성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청년세대에게 ‘눈높이를 낮추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이재오 특임장관, 그리고 다수의 당국자들이 가진 태도와 거의 다름없다. 홍익대 청소용역노동자 문제와 관련해 홍익대 학생들이 학습권을 내세우며 이들의 파업을 비판한 것에 대해 나는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홍대 학생들의 대응이 결코 옳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4년 동안 열심히 데모하고도 졸업할 때 다양한 취직 기회를 가졌던 486세대의 대학생들이 가졌던 사회 연대의식을 이들에게 요구하기 쉽지 않다. 이들을 질타하기 전에 이들이 얼마나 각박한 사회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함께 읽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가 지적하듯이 고려대 학생이던 김예슬씨가 ‘대학 없는 대학’을 자퇴한다고 선언했지만, 그런 선언조차 할 여유가 없는 ‘보통대’ 또는 ‘지잡대’ 학생들이 대부분인 현실도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현재의 20대의 잠재적 역량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만은 아니다. ‘6무세대’라는 표현은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 즉 외적 조건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런 부정적 현실에 압도당한 20대의 한계와 무기력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젊은 세대의 주체적 역량을 살펴보면 매우 밝은 부분이 드러난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같은 젊은 세대들을 ‘C~G(creative, digital, educated, fashionable & fun, global)세대’라고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는 부모세대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창의적이며(creative), 디지털과 인터넷 환경이 공기처럼 편안한 디지털(digital)세대이며, 그것이 상당히 획일적인 입시 위주의 교육이라고 할지라도 역대 어떤 세대보다 평균적인 교육수준이 높은 교육받은(educated) 세대이다. 이들은 또한 시대적 유행에 민감하고 이를 즐거운 놀이로 승화할 수 있는 (fashionable & fun) 세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들은 무엇보다 지금의 어떤 세대들보다 글로벌(global) 시대의 감수성과 경험을 가진 세대이며 글로벌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진아건축 부상훈 대표도 이들 세대의 잠재력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젊은 친구들을 가르쳐보면 대단하다. 그렇게 획일적인 교육을 받아왔는데도 조금만 자극과 영감을 던져주면 정말 놀라운 결과물들을 내놓곤 한다. 이들의 잠재력을 꽃 피울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면 한국을 몰라보게 바꿀 수 있는 세대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도 ‘단군이래 최대의 스펙을 가진 세대’라고 표현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한 중진 정치인도 “젊은 친구들의 역량을 보면 국제무대 어디에 내놓아도 통할만한 잠재력을 가진 친구들이 많다”며 “이들이 정말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한국이란 나라가 너무 잘 될까봐 걱정”이라고 꽤 진지한 농담(?)을 내게 던진 적이 있다.

 

사실 한 중진 정치인의 걱정 아닌 걱정이 정말 터무니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예가 2010년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파 이스트 무브먼트(Far East Movement)’ 그룹의 한국계 멤버 J 스플리프(정재원)과 프로그레스(노지환) 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잘 알려져 있듯이 2010년 중국계와 일본계 멤버와 팀을 이뤄 ‘Like a G6'라는 곡으로 빌보드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 이들의 표현을 빌자면, “주 8일, 하루 25시간을 자유로이 즐기며” “한식, 한국 술 등 우리 모두가 이야기하고 즐기는 것들을 그냥 음악으로 표현”한 것이 미국 대중음악계를 놀라게 한 것이다. 물론 이들은 각각 8개월과 7살 때 미국에 건너가 미국에서 성장한 사람들이기는 하다. 하지만 교육열이 높은 한국 부모 밑에서 자란 한국계 음악인들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우리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끼를 마음껏 발휘하고 기를 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면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소수의 사례를 가지고 일반화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열악한 현실 때문에 우리 젊은 세대의 잠재력이 폄하되고 있지만, 이들의 잠재력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강조하고 싶다.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선택은 시대착오적인 토건개발경제를 끝내고 이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지식정보화 시대, 창의경제 시대에 걸맞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4대강사업과 같은 콘크리트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말랑말랑한 두뇌에 투자하는 것이다. 필자가 여러번 주장한 바와 같이 고교 및 대학 의무교육 확대 방안이 대표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C~G세대’가 가진 잠재력을 억압하고 ‘6무세대’로 머물러 있게 하는 기득권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다. 그것이 이들의 부모이자 선배로서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이다.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

by 선대인 2011. 3. 15. 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