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미 예고된 것이기는 하지만, 24조원 어치의 예타 면제 사업을 추진하겠다는 정부 발표에 실망스럽다. 경기가 침체하고 기득권 언론 등의 공격이 잇따르니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이건 가야할 방향이 아니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공격이 들어오니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은 방향 자체가 잘못된 정책이다. 굳이 이해하자면, 주택시장 침체에 따른 건설투자가 줄어드는 것을 공공 발주 공사로 상쇄하고 싶은 심산일 것이다. 하지만, 혈세를 쓰는 일인데, 최소한의 검증 장치인 예비타당성 조사를 생략하겠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예타는 김대중정부 때 무분별한 예산 사업 추진을 막기 위해 도입한 개혁 방안 아니던가. 그런데 이걸 이명박정부 때 4대강사업 등을 추진하기 위해 지역균형발전 등등의 명분으로 계속 요건을 완화했다. 이미 이명박정부 때 완화된 예타 요건 만으로도 정책성이나 지역균형발전이라는 모호한 기준을 적용받아 경제성이 없는 많은 사업들이 예타를 통과할 수 있게 된 상태다. 그런데 이렇게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는 예타조차도 면제하고 대규모 SOC사업을 밀어붙이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 결정에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이명박정부 때 4대강 예타 면제를 그토록 완강히 반대했던 민주당 정부가 말이다.
지금도 여전히 거의 활용되지 않는 지방공항이 곳곳에 있고, 평일에는 차가 한산한 고속도로며 국도가 한둘이 아니다. 이런 사업들은 지을 때만 수천억~수조원 씩 돈이 들어갈 뿐만 유지, 관리, 보수하는 데도 상당한 예산이 추가로 들어간다. 잠시 경기 좀 살려보겠다고 무리하게 추진한 대규모 예산사업들은 그만큼 두고두고 후세에 짐이 된다. 그런데 기존에 진행된 사업들보다 경제성이나 사회적 타당성이 더 떨어지는 사업들이 이번 발표안 곳곳에 눈에 띈다. 물론 발표된 사업들 중에도 예타를 통과하고 필요성이 인정되는 사업들도 있겠지만, 새만금국제공항이며, 광주전남 경전선 전철화 사업이니 제천~영월고속도로 사업 등 정말 꼭 필요할까, 충분한 수요가 있을까 의문이 드는 사업들이 더 많아 보인다.
나랏돈이 무한정 있다면 이렇게 써도 되겠지만, 예타도 거치지 않고 사업성이 떨어지는 사업들에 돈을 쓰면 정작 써야 할 곳에 갈 돈은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이치다. 24조원 만큼 건설업계는 좋겠지만, 분명히 복지든, 문화든, 교육예산은 줄어드는 게 정상이다. 상대적으로 그만큼 예산이 줄어들어 입는 피해의 대부분은 서민 가계들에 돌아간다.
지난번 수소차 정책에 이어 이번 정책 발표를 보니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의 상당 부분이 기존 정부들처럼 관료 의존형, 그리고 기존 산업-대기업 의존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는 소득주도성장이나 9.13대책이나 공시가격 현실화와 같은 올바른 정책들은 구체적인 내용에서 일부 문제가 있어도 큰 틀에서 얼마든지 옹호할 수 있다. 촛불로 탄생한 정부이기에 정말 잘해주기를 염원하고, 큰 방향에서 옳은 길로 간다면 얼마든지 애정어린 제언과 조언을 할 마음이 있다. 하지만 예타 면제 정책이나 수소차 드라이브는 내 양심으로는 도저히 찬성하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예타 면제 방침을 재검토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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