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어제 KBS사측에서 지난 7월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와 아나운서 60여명에 대한 대대적인 징계를 단행했다고 한다. 20여 년 전에 보았던 풍경을 다시 보고 있자니 전직 언론인으로서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지금 KBS의 후배들을 징계한 50~60대 간부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KBS 사원행동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던
최기자는 우선 ‘국익’이나 ‘중립’ 또는 ‘객관’이라는 미명 아래 언론이 어떻게 사회경제적 강자의 이익을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는 지를 분석한다.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하면 그 실체가 설령 ‘대운하’라고 할지라도 언론은 이를 ‘4대강 정비사업’이라고 부릅니다. 정부가 자신들을 ‘실용정부’라고 칭하면 설명 그 본질이 ‘권위주의적 기득권 옹호집단’에 가깝더라도 언론은 그저 ‘실용정부’라고 표기합니다. 한국의 주류 언론에서 재벌이라는 말 대신 대기업이라는 단어가 쓰이게 된 것도 한국의 재벌이 그렇게 불리길 원했고 또 그 언론이 그 요구에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연장선상에서 왜 ‘대량해고’ 또는 ‘대량감원’ ‘대규모 실직’이라는 단어 대신 ‘구조조정’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왜 ‘근로자, 노동자, 또는 직장인’이라는 용어들 가운데 파업할 때만 왜 ‘노동자’라는 표현을 써서 ‘좌경’과 ‘집단이기’를 덧칠하는 행태도 따끔하게 꼬집는다. 또한 극소수 종합부동산세 대상자들에게 부과되는 종부세에 대해 ‘세금 폭탄’이라고 표현한 기득권 신문들이 ‘서민경제파탄’이라고 매일 노래하던 기득권 신문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훨씬 더 심각해진 상황에서도 입을 다무는 편파적 행태도 비판한다.
그러면 왜 언론들이 상식과 정도를 벗어나 기득권 위주의 보도를 지속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최기자는 “그 책임의 대부분이 기자 생활을 30년 넘게 한 50대 중반 이상의 언론인들에게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최기자의 이 같은 주장은 주로 KBS 내부 사정을 특히 감안한 주장으로 여겨지지만, 대부분 언론에서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구시대적인 시대착오적 발상으로 젊은 기자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필자가 다녔던 신문사에만 국한된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일부 군소 신문사에서는 기사를 광고와 ‘엿 바꿔 먹고’ 기자들에게 사실상 기사를 매개로 한 ‘광고 영업’을 주문하는데, 이런 신문사의 기자들이 무슨 사명의식과 프로페셔널리즘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KBS 내부의 사정은 조금 더 다르고, 심한 것 같다. “한국은 ‘중견언론인’일수록, 도는 ‘중견언론인’이 돼갈수록 오히려 그 수준이 더 떨어집니다. (중략) 이분들은 초년병 시절에는 출입처에서 ‘받아쓰기’에 집중했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나이 마흔이 넘어서는 데스크나 부장으로 들어앉았습니다. 그래서 특히 정치나 경제적 현안을 독립적, 비판적으로 기획하고 취재해서 보도했던 경험이 일천합니다. (중략) 독립적 취재를 못하다 보니 정부가 기업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써서 보도하는 것이 이분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이처럼 ‘받아쓰기 저널리즘’에 젖어 있다 보니 이들 중견 언론인들의 상당수는 90년대 후반 이후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의 탐사보도나 PD저널리즘이 거꾸로 객관 보도가 아니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나 기업의 보도자료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보도물을 기획하는 것은 젊은 PD나 기자의 주관이 개입되어 있기에 방송용으로는 적당치 않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기자는 묻는다. “청와대나 삼성도, 시민도, 단지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자료의 신뢰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최기자는 따라서 “언론은 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것이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의 방송기자들은 이 언론의 본 역할을 거의 방기해왔다고 비판한다.
이들 중견언론인들에 대한 최기자의 비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KBS나 MBC에는 현재의 50,60대 방송 언론인들이 1970~80년대 이후 어떤 보도를, 어떻게 해왔는지 증명하는 많은 자료 테이프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두 방송사 모두 이들 자료를 디지털화하는데 매우 미온적이라는 것. “그들이 진행했던 뉴스나 다큐멘터리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파렴치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게 최기자의 해석이다.
“과거, 정권의 ‘감시견’이기는커녕 ‘애완견’들이었던 이 50, 60대 방송인들이 우리 언론에 끼치는 가장 큰 악영향은 이분들의 과거가 아닙니다. 이렇게 허무맹랑하게 인생을 살아온 분들이 마치 자신들은 언론인으로서의 인생을 살아온 양 과거를 오도하는 현재의 작태입니다. 또 과거를 오도하기 위해 저널리즘의 기본 가치를 왜곡하고 이를 젊은 기자들에게 주입시키면서 발생하는 현장의 폐단들입니다.(중략) 꼿꼿한 딸깍발이 선비와 같은 언론인은 1970~80년대에 대부분 쫓겨나거나 스스로 직장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조직에 순응한 기자들이 언론사의 주류로 자리잡으면서 언론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과 다를 바 없게 됐습니다. 기자가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는 공무원이나 여당 정치인과 비슷한 사고를 하고 비슷한 언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
최기자는 중견 언론인의 문제뿐만 아니라 ‘과잉 상업주의’로 인해 한국 언론의 뉴스가 점점 ‘좁고, 얕고, 얇고, 시끄럽고, 편파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상업주의 언론이 판치는 곳에서 언론이 집중하는 것은 양질의 정보 제공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오로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뉴스들이 난무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1분20여초, 불과 8~9문장과 인터뷰 1,2개로 구성된 방송 리포트에서 여러분은 과연 무슨 정보를 얻습니까? 쓰는 사람도 내 기사에는 정말 정보가 없다고 여길 때가 많은데, 보는 사람이 그 속에서 무슨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요? 신문은 방송 뉴스처럼 ‘팔릴 만한’ 동영상을 사용할 수 없으니 언어로 분탕질을 합니다. 격한 용어와 선정적인 편집으로 독자를 현혹합니다.”
‘권력과 기업을 대변하는 언론’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처럼 이해관계에 깊이 오염된 언론 보도로 인한 대중들의 피해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짚고 있다. 한국 언론기자들이 증시상황을 보도할 때 몇몇 애널리스트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피상적 분석을 짜깁기한 뉴스를 통해 대중들 사이에서 ‘사실’로 굳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기자들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대중들 중에는 이런 식으로 기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최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값싼 뉴스’를 통해 대중들이 얻을 수 있는 정보란 거의 없다며 한국 언론의 날탕식,
‘백인남성 교수’에게 약하고, 정치부나 경제부든 이른바 권력과 돈 있는 출입처를 선호하는 행태를 근거로 권력에 굴종하는 순치된 언론인들의 자화상을 비판한다. 특히 ‘비용을 절감하려는 언론사 사주의 이해관계와 쉽게 일하려는 기자들의 비(非)프로페셔널리즘이 제대로 맞아 떨어지는 지점’으로서 출입처 제도의 폐해를 지적한다. “많은 취재 시간, 인적 사원, 그리고 돈이 들지 않으면 권력을 감시하는 ‘비싼 뉴스’가 나오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사회의 기득권과 ‘등을 지는’ 행위에는 유무형의 압력도 뒤따릅니다.” 삼성X파일 사건을 비롯해 최근까지 한국 언론에서 권력을 감시하는 뉴스가 해당 출입처 기자들에게서 나오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멍청하거나 사악한 언론인이 많을수록 대중은 점점 더 가난하고 불행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하는 짓을 스스로 멈출 거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그들은 대중이 계속 그렇게 우매한 상태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이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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